본문 바로가기

팝 아티스트 A ~ N/[ I ]

Iron Butterfly (아이언 버터플라이)

반응형

 

 

 

1968년 말부터 1970년대까지 아이언 버터플라이(Iron Butterfly)라는 이름은 로큰롤 팬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이었다. 대개의 그룹명들과는 달리 아이언 버터플라이는 멤버들이 설정해놓은 목표와는 논리적 관련이 없다.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리더인 덕 잉글은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우리에게 맞는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음악적으로뿐 아니라 일개인으로서도 헤비하고 꽉 짜이고 무난하고 그런 동시에 가뿐하고 다이나믹하고 다채롭고 독창적인 이름을 붙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무게 있으면서도 귀여운 것으로요. 마침 벌레 이름들이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우리 그룹 이름이 아이언 버터플라이가 된 거지요."

아이언 버터플라이라는 이름은 잉글이 그의 가족을 따라 콜로라도에서 캘리포니아의 샌 디에고로 이주해 와서 살 때 만들어진 이름이다.

 

잉글은 록키 마운틴 지역에서 살던 어린 시절에 음악을 시작했다. 가난했던 잉글네 집에는 라디오도 전축도 없었지만 대신 낡은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교회 올갠 연주자였던 아버지로부터 피아노와 올갠 연주법을 배운 잉글은 청소년 시절 샌 디에고의 스쿨 밴드에서 활동을 하다가 16세 때 그룹을 조직하여 인근의 해군 클럽에서 열리는 댄스 파티 등에서 연주 생활을 했다. 그 뒤 5년간 그는 자기 자신이 그룹을 결성하기도 하고 남의 그룹에 들어가기도 하며 고향에서 그룹 활동을 벌였다.

 

1966년 후반 그는 로스앤젤레스로 상경해 성공을 누려 볼 욕심을 품고 심사숙고하여 밴드를 새로 하나 조직했다. 그가 처음으로 집어낸 멤버는 당시 샌 디에고에 와 있던 이스트 코스트 토박이 드러머 론 부쉬였다. 부쉬는 국민학교 6학년 때 솜방석과 드럼 스틱을 갖고 연습을 하며 드럼 연주의 길에 들어섰다. 뒤에 그는 교사가 되기 위해 샌 디에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여가 시간에는 그룹에서 활동을 하며 합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1966년 가을 아이언 버터플라이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오디션을 시작했다. 잉글과 부쉬 외에 베이시스트로 제리 펜로드(Jerry Penrod), 보컬리스트로 대릴 들로취(Darryl DeLoach), 기타리스트로 대니 와이스(Danny Weis) 등 세 명의 샌 디에고 사람들로 구성원이 갖춰진 아이언 버터플라이는 언더그라운드 음악팬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전해지며 다소의 명성을 얻어냈다.

 

위스키 어 고 고 클럽에서 하룻밤 계약으로 가졌던 공연은 반응이 대단히 좋아 클럽 측은 3주일 추가 연장 계약을 맺기도 했다. 1967년 초 아이언 버터플라이는 위스키 어 고 고 클럽처럼 역시 선셋 스트립 클럽인 갤럭시로 옮겨가 Atlantic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기 전 석 달 동안 공연을 하기도 했다.

 

1968년 1월에 발매된 그들의 데뷔 앨범 [Heavy]는 곧 로스앤젤레스 앨범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그런데 그 무렵 그룹 내의 불화로 멤버 세 명이 탈퇴하여 잉글과 부쉬만 남게 되었다. 잉글과 부쉬는 우선 에릭 브런을 불러들였고 부쉬는 로스앤젤레스의 작은 클럽에서 연주하던 리 도먼을 눈여겨보았다가 그에게 그룹 가입을 요청했다.

 

보스턴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에서 자라난 브런은 네 살 때 바이올린에 소질을 보였고 국민학교 때는 성악 교습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의 샌 페르난도 밸리 지역에서 보낸 십대 시절에는 기타 교습도 받았고 소극장 무대에 올려진 'The Drunkard'라는 연극의 주연을 맡기도 했었다.

1968년 네 번째 멤버로 그룹에 들어온 리 도먼은 카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몬트레이 베이 지역을 떠나 샌디에고로 옮겨온 뒤인 1966년에야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도먼이 처음으로 익힌 악기는 아홉 살 때 배운 아코디언이었다. 그 뒤 도먼은 드럼과 피아노를 배웠고 베이스와 리듬 기타도 익혔다.

 

첫 앨범을 내면서 힘을 얻은 네 멤버는 1968년 4월, 5월에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도는 전국 투어를 시작했다. 젊은 록 팬들이 보여준 열광적인 환호는 아이언 버터플라이가 수퍼스타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이언 버터플라이는 Atco 레이블에서 첫 싱글로 'Possession'을 발표한데 뒤이어 'Unconscious Power'를 1968년 차트에 올려놨다. 두 곡 다 잉글에 의해 쓰여졌으며 이 노래들은 1968년 'Savage Seven'이라는 영화에도 삽입됐는데 이 영화에는 크림(Cream)도 나온 바 있다. 잉글이 쓴 17분짜리 'In-A-Gadda-Da-Vida'도 실렸다. 이 노래는 짧게 줄여져 싱글로 발매되어 커다란 히트를 기록했고 [In-A-Gadda-Da-Vida] 앨범도 골드를 기록했으며 세 번째 앨범 [Ball] 역시 골드 레코드가 됐다.

 

1969년 말 브런이 그룹을 떠나면서 그는 드러머 레니 페이전(Lenny Feigen),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오리지널 멤버였던 제리 펜로드, 대릴 드로쉬와 함께 플린트위슬(Flintwhistle)이라는 독자적인 그룹을 결성했다. 한 편 잉글과 부쉬, 도먼은 마이크 피네러와 래리 "리노" 라인하르트라는 플로리다 태생 싱어 겸 기타리스트 두 사람을 데려왔다. 피네러는 열 다섯 살 때 탬퍼의 선술집에서 연주 생활을 시작하여 리듬 앤 블루스 밴드와 순회 공연 생활을 해 나갔는데 블루스 이미지(Blues Image)라는 밴드의 멤버로 있으면서 이따금 아이언 버터플라이와 잼을 한 적도 있었다. 아이언 버터플라이에 들어간 그는 오랜 친구인 라인하르트를 추천하여 그룹에 들어오게 했다.

 

라인하르트는 트로피컬 트립 컴퍼니(Tropical Trip Company), 세컨드 커밍(Second Coming) 등 서던 그룹들을 숱하게 거쳐온 인물이었다. 아이언 버터플라이 측으로부터 가입 제의가 들어올 무렵 그는 조지아 주의 메이컨에 있는 필 월든 스튜디오에서 세션맨으로 일하며 히치하이크로 로스앤젤레스에 상경할 계획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재정비된 아이언 버터플라이는 1970년 [Live]와 [Metamorphosis] 앨범을 발표했다. 두 앨범 다 잘 팔리기는 했지만 [In-A-Gadda-Da-Vidda] 앨범이 거두었던 성적만큼은 올리지 못했다.

 

1971년에 접어들어서는 아이언 버터플라이도 눈에 띄게 힘을 잃었다.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공연 장소도 대형 회관에서 3,000~5,000석 규모의 소규모 홀로 축소되었다. 결국 아이언 버터플라이는 1971년 5월 23일 고별 공연을 마치고 해체의 결단을 내렸고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섰다.

그 뒤 17년간 잠잠했던 잉글, 부쉬, 도먼, 브런은 다시 모여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차례의 재결합 공연을 가졌다. 멤버들은 나름대로 만족감을 가질 수 있었고 아이언 버터플라이를 재규합해 1988년에는 50개 도시 순회 공연을 갖기도 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