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스티브 매리엇이 스몰 페이시즈(Small Faces)를 나가버린 것은 스몰 페이시즈로서는 엄청난 재난이었다.
(물론 뒤에 스몰 페이시즈는 재결성되어 1970년대에는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를 앞세워 스타덤에 오르기는
했지만..) 당시 영국 땅의 실력 있는 보컬리스트 중의 하나로 꼽혀졌던 매리엇은 영국 록 그룹을 이끌어갈 재목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비록 얼마간은 매리엇이 새로 들어간 밴드의 성공여부는 미지수로 보였지만 결론적으로 스몰 페이시즈의 손실은 험블 파이(Humble Pie)의 입장에서는 획득이었다. 그 시기에 걸출한 실력을 보였던 밴드들이 대개 그랬듯이 험블 파이 역시 다른 그룹들에 몸담았던 아티스트들이 재규합한 조직체였다. 험블 파이는 피터 프램튼(Peter Frampton)이 몸담았던
허드(Herd)라는 밴드의 해산과 그 출발을 같이 한다.
때는 1968년 후반, 프램튼과 매리엇이 만났을 당시를 매리엇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피터와 제리 셜리는 밴드 하나를 새로 결성하여 키보디스트, 베이시스트, 기타리스트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나도 그룹에 들어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또 그렉 라이들리도 그룹에 불러들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여진 네 사람은 매리엇이 사는 에섹스 지방 오두막집으로 옮겨가 곡들을 준비해 나갔다. 그들은 1969년 중반 영국의 Immediate 레코드사와 계약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6개월 간 리허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매리엇, 프램튼, 라이들리는 보컬을, 셜리는 드럼, 피아노, 올갠, 비브라폰, 기타 등 다양한 악기를 담당했는데 매리엇은 기타, 피아노, 올갠, 플롯, 하모니카, 드럼 등의 악기도 연주했고 라이들리도 베이스 뿐 아니라 리드 기타와 리듬 기타도 연주할 수 있었다. 험블 파이는 1969년 여름 스튜디오에서 첫 번째 싱글곡인 'Natural Born Boogie'와 [Town And Country], [As Safe As Yesterday] 2장의 앨범을 작업했다.
험블 파이는 영국 팬들에게는 다소 성원을 받았으나 일렉트릭 악기보다는 어쿠스틱 악기 연주를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요란한 일렉트릭 연주에 익숙한 미국인들에게서는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뒤에는 이들이 소속
돼 있던 Immediate 레코드사가 망해버렸다. 해체설이 오가기도 했지만 새로 매니저로 들어온 디 앤소니(Dee Anthony)
라는 미국인은 멤버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얼마 뒤 디 앤소니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A&M 레코드사와 계약을
따냈다.
그 때부터 일은 잘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A&M에서의 데뷔 앨범인 [Humble Pie]는 1970년 그런대로 성공을 거뒀고 다음 앨범인 [Rock On]은 1971년 베스트셀러 앨범이 되었다. 1971년 초 험블 파이가 가진 미국 투어는 대성공이어서 비평계로부터는 격찬을, 대규모 청중들로부터는 박수 갈채를 얻어냈다. 공연 실황을 담은 앨범 [Rockin' The Fillmore]는 1971년 가을에 발매되어 골드를 기록했다.
이 앨범이 나온 직후 피터 프램튼이 솔로로 활동하기 위해 그룹에서 탈퇴했다. 프램튼은 A&M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1972년에 [Winds Of Change]를, 1973년에는 [Frampton's Camel]을 발표했는데 캐멀(Camel)은 그가 새로 결성한 백밴드의 이름이기도 했다. 뒤에 그는 두 장의 플래티넘 앨범([Frampton Comes Alive!](1976), [I'm In You](1977))와 [Frampton]
(1975), [Where Should I Be](1979) 등 두 장의 골드 앨범을 획득했다.
험블 파이에서 프램튼이 나간 자리는 데이브 "클렘" 클렘슨으로 채워졌다. 클렘슨은 1971년에 해산된 콜로세움(Colosseum)이라는 밴드의 대들보로 있던 인물이었다. 험블 파이의 후속 앨범인 [Smokin']은 1972년에 골드를 기록했다. Immediate에서 나왔던 험블 파이의 초기 앨범 2장이 [Lost And Found]라는 새로운 타이틀이 붙여져 A&M에서 같은 해 재발매됐고 1973년 봄에는 R&B에서 하드록에 이르는 음악들을 담아 스튜디오와 라이브로 녹음한 더블 앨범 [Eat It]이 A&M에서 나왔다.
이후 험블 파이는 [Thunderbox](1974), [Street Rats](1975) 두 장의 앨범은 A&M에서 더 발표했는데 예전 앨범들을 답습한 실패작으로 비쳐졌다. 험블 파이가 막바로 비실비실해 진 것은 아니었지만 매리엇이 1975년 말 험블 파이를 해체하기 전부터 그룹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음을 이미 그는 감지하고 있었다.
1980년대 초 그가 어느 기자에게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그룹 활동을 하며 생겼던 문제점 중의 하나로 과로를 꼽았다.
"쉬어보려고 발버둥쳤지만 쉬어 본 적이 없었다. 몸무게가 오십 킬로그램도 안 되게 떨어져서야 내가 나 자신을
죽여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쉬면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1977년, 그는 스몰 페이시즈와 활동을 해 볼 길을 모색했는데 이 일은 1978년 말에야 성사가 됐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영국 언론들은 나를 노친네라고 지칭하며 내가 음악계에서 꺼져버려야 된다고 종알댔다. 당연히 내 마음은 아팠다."
그러나 70년대 말 젊은 영국 록 팬들이 옛날 그룹들에 관심을 보이게 되자 1980년 매리엇은 험블 파이를 재결성할 결심을 굳혔는데 클렘슨과 라이들 리가 재가입을 거절한 관계로 그는 제프 벡(Jeff Beck) 의 백밴드에 있었던 바비 텐치를
기타에, 앤소니 "스코티" 존스를 베이스 자리에 불러 앉혔다. (존스는 한때 험블 파이의 드러머 제리 셜리와 한 그룹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었다) 새로 탄생한 험블 파이는 Atlantic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1980년대 초 [On To Victory]와
[Go For The Throat]을 발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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