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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티스트 A ~ N/[ E ]

Elton John (엘튼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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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판매고나 오래도록 지속된 명성에 있어 70년대 초기에 이미 팝계의 수퍼스타로 자리잡은 엘튼 존(Elton John, 본명 Reginald Kenneth Dwight)을 능가할 수 있는 뮤지션은 없을 것이다.
싱어송라이터로서 그는 비틀즈식의 팝뿐만 아니라 소울, 디스코, 컨트리, 고전적인 팝 발라드,

심지어는 프로그레시브 록까지 섭렵하여 70년대 최고의 레코딩 아티스트가 되었다. 또한 역동적인 카리스마와 화려한

무대로 약 30년 동안이나 수퍼스타로서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4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엘튼 존은 11살 때 왕립 음악학교(Royal Academy of Music)의 장학생으로 입학할 정도로 음악에 관한 한 천재적인 재질을 갖고 있었다.

 

61년 블루솔로지(Bluesology)라는 밴드에서 연주를 하면서 동시에 지역의 호텔에서 솔로 콘서트를 갖기도 한 그는 66년 밴드 해체 후 작사가 버니 토핀(Bernie Taupin)을 만나 현재의 엘튼 존('엘튼'은 예전 밴드 블루솔로지의 색소포니스트

엘튼 딘(Elton Dean)에서, '존'은 밴드가 소속되었던 뮤지션 존 발드리(John Baldry)로부터 딴 것이다)이란

이름으로 바꾼다.
68년부터 'I've Been Loving You Too Long', 'Lady Samantha' 등 자신의 싱글을 발표해 좋은 반응을 얻었고,

69년 데뷔앨범 [Empty Sky]를 발표했다.

70년 두 번째 앨범 [Elton John]에서 'Your Song'으로 본국인 영국에서 인정을 받은 그는 곧 미국 시장을 겨냥하여 LA에서 첫 미국 콘서트를 가진 후 퀸시 존스(Quincy Jones), 레온 러셀(Leon Russell)을 비롯한 많은 아티스트와 비평가들로

부터 호평을 받게 된다.
이에 힘입어 71년 컨셉 앨범인 [Tumbleweed Connection]으로 공중파 방송의 지지를 받고 앨범 차트 10위에 오른 그는 이어 라이브 앨범 [11-17-70]과 영화 [The Friends]의 사운드 트랙을 발표했고, [Madman Across the Water](71)까지

왕성한 레코딩 작업과 라이브 무대로 꾸준한 인기를 모아갔다.
72년 [Honky Chateau]를 발표, 'Rocket Man', 'Honky Cat'의 싱글에 힘입어 US 넘버원을 차지하며 스타덤에 오른 그는 76년까지 버니 토핀과 공동작업으로 'Crocodile Rock', 'Daniel', 'Bennie and the Jets', 'The Bitch is Back', 'Philadelphia Freedom', 'Saturday Night's Alright for Fighting' 등의 싱글로 차트를 강타했다.
또한 [Don't Shoot Me I'm only the Piano Player](73), [Goodbye Yellow Brick Road](73), [Caribou](74), [Greatest Hits](74),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75), [Rock of the Westies](75)까지 6개의 앨범을 연속으로 차트 정상에 올리면서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등 명실공히 히트곡 제조기로서 70년대 팝계를 주름잡았다.

그러나 76년 엘튼 존이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양성애자(bisexual) -실은 동성애자였지만- 라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고백을 한 뒤, 보수적인 팬들은 한동안 그를 외면했고 버니 토핀과도 결별하게 되었다.
한동안 공연과 앨범활동에서 침체기를 보였던 엘튼 존은 80년 다시 버니 토핀과 팀을 이뤄 [21 at 30]을 발표, 'Little Jeannie'를 톱 텐에 진입시켰고 81년 [Jump Up!]으로 골드를 기록하며 'Blue Eyes', 존 레논(John Lennon)에게 바치는 'Empty Garden (Hey Hey Johnny)'로 말 그대로 점프 업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그는 꾸준히 골드 앨범을 양산했고, 'I'm Still standing'(83), 'I Guess That's Why They Call It the Blues'(83), 'Sad Songs (Say So Much)'(84), 'Nikita'(86), 'Candle in the Wind'(87), 'I Don't Want To Go on With You Like That'(88) 등을 히트시키며 다시 한번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그의 성공적인 커리어와는 달리 사생활은 술과 코카인의 남용으로 성대에 이상이 생겨 수술까지 받아야 할

정도로 불우한 것이었다.

88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Madison Square Garden)에서의 공연 이후 자신의 화려한 무대의상과 수천 개의 개인적인

기념물들을 모두 경매 처분한 이후 몇 년간의 개인적, 정신적인 분투 끝에 평정을 되찾은 그는 92년 엘튼 존 AIDS 재단

(Elton John AIDS Foundation)을 설립, 그의 모든 싱글 판매 로열티를 AIDS 연구기관에 헌납할 것을 발표한다.

그 해 발표한 [The one]은 US 차트 8위에 랭크되면서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했고, 워너/채플 뮤직과 약 3900만 달러에

달하는 음반 출반 계약을 맺게 되었다.

94년 작사가 팀 라이스(Tim Rice)와 작업한 월트 디즈니 만화영화 [The Lion King]의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으로 아카데미 최고 사운드 트랙(Best Original Song)상과 그래미 최우수 남자 팝 보컬(Best Male Pop Vocal Performance)상을 수상한 엘튼 존은 95년 [Made In England]로 플래티넘을 기록하였다.

 

한편 97년 가을에는 불우한 죽음을 맞이한 다이애나(Diana) 왕비의 장례식에서 그녀를 추모하는 노래를 불렀다.
약 20억 명의 조객들이 모인 웨스트민스트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연주된 예전 히트곡 'Candle In The Wind'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수많은 공연 중 가장 찬사를 받은 감동적인 것이었으며, 곧 발매된 자선 싱글은 막대한 판매량을 기록해 종전 빙 크로스비(Bing Crosby)의 'White Christmas'의 기록을 능가하게 되었다.

97년 [Big Picture]로 또 한번의 상업적인 성공을 구가한 엘튼 존은 금세기 최고의 작곡가이자 그에 비해서는 조금 과소평가 되는 피아니스트로서 여전히 주옥같은 작품들로 전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현존하는 가장 성공적인 팝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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