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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티스트 A ~ N/[ G ]

Guess Who (게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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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대중음악계는 더 후(The Who)와 게스 후(Guess Who)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해했었다. 그들은 둘 다 록 그룹이었는데 후에 브리티쉬 록을 영국적으로 계승해 갔고 게스 후는 캐나다인의 주체성을 발전시켜 갔다. 오리지널 멤버는 모두 캐나다 미네소타, 노스 다코다와 밀접해 있는 마니토바의 위나펙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캐나다인들처럼 그들도 미국의 음악과 유행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게스 후는 1960년 중반 랜디 바크만에 의해 결성되기 시작한다. 랜디 바크만은 하이스쿨 시절에 기타를 배웠는데 마니토바 공학 대학에 들어가면서 다양한 록과 컨트리 웨스턴 밴드를 경험하게 된다. 그의 영향은 나중에 게스 후의 작품에서 나타나게 된다. 1966년 대학을 마친 후 바크만은 위니펙 출신의 4명의 라인업을 갖춘 밴드를 결성하려고 마음먹는다.

 

그와 처음 접촉을 가진 버톤 커밍스는 오래된 옛날 음반을 모으는 취미를 갖고 있었고 작곡에도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이후 커밍스는 게스 후에서 리드 보컬과 리듬기타, 피아노, 오르간 등을 담당하게 된다. 드러머 게리 페터슨은 어렸을 때 작은 차이니스 드럼을 치게되면서 드럼에 입문하게 된다. 퍼커션을 연주하는 아버지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곤 했던 그는 4살 때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드럼 치는 모습을 보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곤 했다. 그는 또한 캐나다 TV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심포니 악단과 함께 연주를 한 경력이 있었다.

 

4번째 멤버인 베이시스트 마이클 제임스 케일은 학교에 다닐 때 음악에 흥미를 느껴 베이스를 잡게 되었고 블루스와

포크록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게스 후에 가입하기 전에 약 6년간 밴드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그들이 다 모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1966년 말쯤에 팀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과 같이하여 위니펙에서 가장 유명한 밴드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들은 CBC방송의 주간 쇼프로그램에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게스 후는 그곳에서 바크만과 커밍스가 작곡한 'And She's Mine', 'Clock On The Wall', 'Of A Dropping Pin', 'Laughing'을 소개하면서 캐나다 레코드 회사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 당시에 무려 19곡이나 되는 싱글이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그룹은 영국과 미국에서 공연을 갖기 시작한다. 미국 보스턴 공연에서 게스 후는 좋지 않은 평가를 얻게 된다. 그들의 캐나다 히트곡 'Shakin All Over'를 부를 때 안개효과와 함께 기타를 부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것을 보고 흥분한 관중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많은 부상자를 낸 이 사건 이후 그들은 더욱 유명해진다.

 

1968년 말 'These Eyes'는 그들의 최대 히트곡이 된다. 이 결과로 그들은 1969년 1월에 RCA레코드와 계약을 하게 되고 곧이어 싱글을 발표하게 된다. 이들의 미국 데뷔앨범 [Wheatfield Soul]은 백만 장 이상 팔리는 커다란 성공을 이루게 된다. 그들의 다음 앨범 [Canned Wheat]는 1969년에 발표되었는데 'Laughing'과 'Undun'의 히트 싱글을 내면서 많은 판매고를 올리게 된다. 1969년 말에는 미국 탑 텐 히트곡 'No Time'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American Woman'을 그들의 히트싱글 대열에 올려놓으면서 골드레코드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후 바크만은 다른 멤버들과 음악적 방향이 맞지 않아 1970년에 그룹을 탈퇴하게 된다. 그는 탈퇴 후 자신의 그룹 바크만 터너 오버드라이브를 결성 활동했다. 바크만의 자리는 두 명의 캐나다인 커트 윈터와 그렉 레스키브로 채워졌다. 두 명 모두 기타리스트인데 그 중 윈터는 'Hand Me Down World'라는 곡을 작곡해 명성을 얻은 바 있었고 레스키브는 닐 영과 흡사한 외모를 가졌는데 와일드 라이스(Wild Rice)라는 밴드에서 기타를 쳤었다.

 

얼마 후 레스키브가 탈퇴해 돔 맥도갈로 교체되었으며 1974년 여름에는 맥도갈과 윈터가 다시 탈퇴하게 된다. 기타리스트 자리는 제임스 갱(James Gang)과 활동했던 톰 트리아노로 교체됐으며 이때 베이스 주자도 케일에서 빌 월레스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방황이 밴드의 추진력을 상실하게 만들 것이라는 주위의 우려를 딛고 그들은 1976년에 새 앨범

발표와 함께 활동을 재개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운드는 예전 같지 않아 팬들의 실망을 얻게 된다. 이후 커밍스는 밴드의

활동정지를 선언한다.

 

1년의 세월이 흐른 후 1977년 11월에 제임스 케일과 맥도갈은 새로운 게스 후를 만드는데 동의한 후 기타에 데이빗 잉글리스와 드럼에 반스 매스터스를 영입해 게스 후를 재시동하게 된다. 그들은 공연과 함께 [All This For A Song]을 아틀랜틱 레코드 산하의 힐택 레코드에서 1979년에 발매한다. 그러나 그들의 새로운 시도는 팬들의 외면으로 다시 활동 중단과 함께 해체되고 만다.

 

초기 게스 후의 리더 랜디 바크만은 밴드를 떠난 후 솔로 앨범 [Axe]를 RCA레코드에서 발표했다. 이후 그는 동생 로비

바크만(드럼), 씨에프 터너(리드 기타, 베이스, 보컬), 채드 앨런(리드보컬)과 함께 브레이브 벨트라는 그룹을 결성하게

된다. 이들 중 앨런은 게스 후의 초창기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브레이브 벨트는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하였으나 큰

성공을 얻지는 못했었다.

 

보컬인 앨런의 탈퇴 이후 그들은 바크만 오버드라이브로 그룹명을 바꾸며 새로운 활동에 들어간다. 그들은 헤비 듀티 록이라는 파워 있는 음악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팀 바크만이 세컨 기타를, 블레어 토른톤이 드럼을 맡게 된다. 머큐리에서 그들은 다섯장의 골드 앨범을 냈는데 그중 'You Ain't Seen Nothing'은 1974년 11월 19일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바크만 오버드라이브는 랜디 바크만이 밴드를 떠났다가 1984년 터너와 그의 형제 팀 바크만과 함께

재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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