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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티스트 A ~ N/[ F ]

Free (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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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 브리티쉬 블루스 붐을 주도한 밴드 중 하나였던 프리(Free)는 1968년 런던에서 결성됐다.

1950년대 록큰롤의 융기 이후 블루스는 본고장 미국에선 이것이 흑인 음악으로부터 잉태됐다는 것이 태생적 한계로

작용해 멸시를 받았고, 의도적으로 스포트라이트의 사정권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러나 대서양 건너편 영국의 젊은 음악인들이 흑인 음악에 관심을 나타내면서 팝 음악계에 큰 획을 그은 밴드들이 출현했다. 비틀즈가 그랬고 그들의 라이벌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더 후(The Who), 애니멀스(Animals), 야드버즈(Yardbirds) 같은 브리티쉬 인배이션을 주도한 밴드들이 그러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좀 더 하드록에 근접하면서도 블루스 필을 고이 간직한 블루스 하드록 그룹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바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험블 파이(Humble Pie), 크림(Cream),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 등이었다.

프리도 이들과 같은 시대를 호령했던 블루스 하드록 밴드다.

 

미국 흑인 블루스의 마법에 빠진 드러머 사이먼 커크(Simon Kirke)와 기타리스트 폴 코소프(Paul Kossoff)가 조우하면서 그룹 프리의 첫 단추가 꿰어진다. 팀의 목소리를 급구하던 이들은 런던의 클럽에서 노래하던 무명 싱어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소울풀하고 블루지한 보컬과 카리스마적 무대 매너로 청중을 압도했다. 폴 로저스(Paul Rogers)

였다. 사이먼은 “오티스 레딩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그의 보컬은 특별했고 지금도 그렇다”라고 말한다.

 

영국 블루스의 대부 알렉시스 코너(Alexis Korner)는 프리에겐 아버지였다. '프리'라는 이름을 작명했고, 팀의 베이스 주자로 당시 나이가 15살의 미소년 앤디 프레이저(Andy Fraser)를 소개했지만 그는 이미 존 매이올 & 블루스브레이커스

(John Mayall & Bluebreakers) 같은 큰물에서 놀던 거물급(?) 인사였다.

 

사이키델릭의 중흥기와 프로그레시브의 태동기였던 1960년대 후반 그 반대 급부로 프리는 음악적으로 현란한 장식을 배제하고, 폴의 보컬에 포인트를 주면서 끈적끈적하고 호방한 사운드 스케이프로 가닥을 잡아갔다.

이러한 시도는 2집 'Free'에서부터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해 3번째 작품 'Fire And Water'에서 꽃을 피운다. 영화 '나우 앤 덴'과 '아메리칸 뷰티'에 나왔던 스매쉬 히트 싱글 'All right now(4위)'로 이들이 더 이상 영국용 밴드가 아니라 국제적인 그룹으로서의 위상을 얻는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다음 앨범 'Highway'는 의외로 실패했고 그로 인해 팀 내분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신의

분신처럼 서로를 아꼈던 이 4명의 영국인들은 그런 애정을 마지막 음반 'Heartbreaker'에 쏟아 붓고는 1973년 밴드를

해산함으로서 각 멤버들은 그룹 '프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후 폴 로저스와 사이먼 커크는 킹 크림슨의 멤버 보즈

버렐(Boz Burrell), 못 더 후플(Mott The Hoople)의 기타리스트 믹 랄프스(Mick Ralphs)와 함께 걸출한 밴드 배드 컴퍼니(Bad Company)를 조직해 프리보다 더 큰 성공을 거뒀지만 새로운 음악 활동을 계획했던 폴 코소프는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혔던 약물 중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1976년 3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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